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-프랑스 관계 (문단 편집) === 백년전쟁과 전쟁 이후 === 그러나 왕위계승 문제, 프랑스 국내의 잉글랜드 영토 문제로 인해 [[백년전쟁]]이 터지면서 잉글랜드는 농민 장궁병 위주로, 귀족 기사군 위주의 [[프랑스]]를 대규모 전투에서 여러번 박살내며 급기야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프랑스 영토의 절반 수준을 집어삼킬 정도로 우세를 점했다. 궁지에 몰렸던 프랑스는 [[잔 다르크]]의 등장으로 간신히 그 위기를 막아내고 그녀의 희생 이후에 잉글랜드 세력을 칼레를 제외[* 칼레는 백년전쟁 이후로도 잉글랜드의 땅이었지만 메리 1세 시기에 프랑스가 확보하게 된다.]한 프랑스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냈지만 워낙 길었던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도 상당히 타격을 입었다. 노르망디 공 시기에 [[프랑스어]]가 [[영어]]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건 왕실이나 귀족이 쓰는 고급 언어 차원이었고, 대중 언어의 측면을 보면 프랑스어에 영향을 미친 [[라틴어]]가 [[영어]]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. 참고로 프랑스어의 경우 지금도 사전에서 라틴어 어원을 쉽게 찾을 수 있다.[* 프랑스어가 라틴어 후손인 만큼 라틴어에서 온 단어들이 아주 많다. 프랑스어 좀 배운 사람이라면 간단한 라틴어를 읽거나 천천히 말했다면 알아들을 수도 있다. 예) 나는 한국에 산다. J'habite en corée/ (ego) habito in corea]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게르만족 언어를 베이스로 야매 라틴어를 섞어 쓰던 잉글랜드가 원조에서 많이 변질되었지만[* 프랑스도 로망스어군 중에서는 발음이 꽤나 튀는 편이다.] 직접 라틴어를 구사하던 프랑스를 베꼈다는 게 정확하다. 그렇게 사이가 안좋은 나라였지만 국익에 따라 협력하는데 중세 시대 프랑스가 제일 두려웠던 주적은 잉글랜드가 아닌 [[신성 로마 제국]]으로 대표되던 [[합스부르크]]였다.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체결하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합동 공격을 가한다면 위기가 오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[[제임스 1세]]와 프랑스의 [[루이 13세]]가 사돈을 맺은 것도[* 이로 인해 [[제임스 1세]]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였던 [[찰스 1세]]와 [[루이 13세]]의 여동생이자 [[앙리 4세]]의 딸이었던 [[앙리에트 마리]]가 결혼하게 되었다.] 후방을 안정시키고 합스부르크를 치기 위함이었다. 이후 17세기에 [[30년 전쟁]]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구교임에도 신교 편으로 투입돼 싸웠고, 그 와중에 프랑스와 인구가 엇비슷했던 [[독일]] 지역은 1700년에 1,960만 수준으로 회복했을 정도로 처참히 파괴되었다.[* 출처: [[http://www.populstat.info/Europe/germanyc.htm|독일 전 국토의 역사적 인구자료(영어)]]] 17세기가 지나면서 [[잉글랜드]]는 해군력을 발전시켜 당시 먼저 [[대항해 시대]]에 진출하여 패권을 부리던 [[스페인]], [[포르투갈]], [[네덜란드]]와 비슷한 위치로 올라섰으며, [[북아메리카]]쪽에 식민지를 개척했다. 프랑스나 스코틀랜드도 한 몫 해보려고 했는데 이들의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고 [[7년 전쟁]] 등을 거치면서 영국이 북미 및 인도 식민지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